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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시인,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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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쇼팽은 프랑스어 교사인 아버지, 폴란드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1810년에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고,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8세 때엔 이미 신동으로 명성을 얻었고, 15세 무렵엔 러시아 황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0곡이 넘는 피아노곡을 작곡했는데, 피아노의 아름다운 소리를 효과적으로 잘 드러낸 그를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죠.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29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고 해요.​ 

 

쇼팽과 연인이었던 여류 작가 조르즈 상드는 쇼팽의 음악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요, 상드와 같이 했던 시기에 많은 곡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을 그녀가 모성애적 애정으로 그를 돌보아줌으로써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약 10년이나 계속되었지만 1846년 가정불화와 쇼팽의 건강악화가 원인이 되어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됩니다.

 

1848년 쇼팽은 영국으로 건너가 연주회와 개인적 모임 등에서 피아노를 계속 연주하였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후 그의 건강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이듬해 가을,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었는데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고 합니다. 쇼팽의 시신은 유명인사들이 묻혀있는 무덤, 파리 페르라세즈에 안장되었고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십자가 교회에 있는 기념비에 묻혔습니다. 그의 묘지에는 지금도 향과 꽃이 끊이지 않고,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로 붐비고 있다고 하네요.

  

쇼팽의 곡 중 즉흥 환상곡은 너무도 유명하지요.

<즉흥 환상곡>은 4개의 즉흥곡 중에서 제일 먼저 작곡한 곡이지만, 쇼팽이 죽은 후에야 세상에 알려져서 즉흥곡 중에서 제일 마지막 곡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세상에 알려진 걸까요?

 

쇼팽은 젊은 시절인 24세에 작곡한 <즉흥 환상곡>을 무척 아꼈다고 하는데요, 자신만의 작품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건지 늘 자신의 악보 사이에 끼고 다니며 내놓지 않았다고 하고, 심지어 자신이 죽은 뒤에는 악보를 없애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이 곡은 쇼팽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져 오늘날까지 사랑받게 되었습니다.

 

 

 

즉흥 환상곡, 감상해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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